본문 바로가기 상단메뉴 바로가기 하단 주소 바로가기

체육포털 로고

경희대 신궁 강채영, '제 29회 타이페이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2관왕 등극!
미리보기 이미지

스포츠미디어

  • 사이트 이용문의 페이지로 이동
  • pc원격제어 사이트로 이동

스포츠원 기사

Home > 스포츠미디어 > 스포츠원 > 스포츠원 기사
근대 여성 체육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들
2020.03.23 407
  • 년월호 2020년 3월호

 

 

Sports in KSOC

KSOC 100년사

 

근대 여성 체육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들

 

. 정태화 현 ()한국체육언론인회 사무총장, 대한민국 체육 100년사 편찬위원, 전 서울신문 체육부장

 

우리나라 여성 체육의 역사는 여학교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개화기의 물결이 밀려들기 전까지 여성의 체육활동은 사실상 전무했다. 명절이 주로 하는 널뛰기, 그네뛰기, 윷놀이, 투호 등 민속놀이들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체육이라고 하기 보다는 유희나 오락에 가까웠다. 1886년 근대식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설립되고 6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우리나라 여성 체육은 봉건적 여성관을 허물게 하고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성 체육의 시작은 여학교에서

조선이 근대화되고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나 광복이 될 때까지 여학교라고 하면 여자고등보통학교’, 여고보로 보통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이 진학한 중등교육기관을 말한다.

1886531일 우리나라 첫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설립된 이후 정신(1886), 진명(1896), 배화(1898), 명신(1906·현 숙명), 한성(1908·현 경기), 동덕(1908)를 비롯해 인천에 영화(1892·현 영화초등학교), 개성에 개성여학당(1899·현 호수돈의 전신), 전주에 기전(1903), 평양에 숭의(1903), 함흥에 영생(1903), 대구에 신명(1907), 광주에 수피아(1908) 1910년대에는 전국에 여학교만 170여 개가 설립되었다.

바로 이러한 여학교들에서 체조가 정식교과 과목으로 채택되면서 여성 체육도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사회의 통념으로 여성들이 교육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전통과 구습을 타파하는 일대 혁신이었는데 여기에 여성체육, 즉 체조가 정식 교과과정으로 받아들이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화학당조차도 조세핀 페인(J. O. Paine)18939월에 제3대 학당장으로 취임해 처음으로 체조를 시작하면서 조선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개화 초기에 체육은 신교육을 받은 일부 제한된 계층에서만 성행했을 뿐 대부분의 계층, 특히 양반들은 운동에 대해 경시하는 풍조가 여전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여성들이 체육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일부 여성들도 스스로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체육을 육체적 활동으로만 여겨 기피하거나 배척하기도 했다. 이에 양반집에서는 이화학당을 나온 여성들은 며느리로 들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페인이 학당장으로 취임하면서 체조과목을 시작했을 때 큰 소동이 벌어졌다. 부녀자들은 걸을 때 손을 흔들기를 마음으로만 하고, 발 뗄 때 발바닥보다 더 내딛지 못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고, 고개를 돌릴 때도 몸과 함께 돌리며, 앉을 때는 오금과 발목을 번갈아 가며 서서히 좁혀 앉으라고 가르침을 받았다. 즉 행동은 곧 부덕이며, 생명체를 움직이는 데 최소한으로 행동을 제한시켰던 것이다. 숨 쉬는 목석이 바로 부녀자의 이상상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시절에 손을 내어 흔들고 가랑이를 벌리며 달음질을 시키는 체조를 가르쳤으니 반대 여론이 들끓지 않을 수 없었다. 학부형들은 딸을 데려가겠다고 학교 문안으로 들이닥치고 한성부에서는 체조를 없애라는 공문이 계속 날아들었다. 페인 학당장은 이러한 물의에 굴복하지 않고 대담하게 체조를 강행하였다.”(이화 80년사에서)

사회적 파문에도 불구하고 이화학당은 체조를 정식과목으로 채택함으로써 점차 여학교들로 퍼져 나가 근대 여성 체육의 모태가 됐다. 이렇게 이화학당에서 첫 체조를 가르치기 시작한 뒤 정신여학교는 신체의 부분 운동과 전체 운동, 그리고 기구를 가지고 율동도 하는 교육을 실시했다. 배재학당 교사였던 존스의 부인 뱅겔이 제물포에 설립한 영화여학당은 체육 교사 마커가 부임해 체조를 가르쳤다. 그는 체조 시간이면 짤막한 막대기를 들고나와 구령을 붙이며 줄을 똑바르게 서는 법’, ‘발을 맞춰서 운동장을 도는 법’, ‘팔 운동’, ‘허리 운동’, ‘가슴 운동’, ‘머리 운동등을 한 줄로 서서 실시했다. 캠벨 여선교사가 배화학당에서는 매일 오후 수업이 끝난 다음에 전 교직원과 학생이 모여 체육활동을 했으며 엄황귀비가 설립한 숙명여고보는 개교 당시부터 체육에 관심을 갖고 그네, 체조, 유희(무용), 터치 볼 등의 종목을 가르쳤다.

 

여성이 처음으로 여학교 운동회 주관자 맡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여성들이 신교육을 받고 사회생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함께 여성운동도 시작됐다. 1906년 순천군의 서현여자학회가 주최한 순천군 여학교 운동회, 1908424일 자선부인회 춘기운동회는 여성 단체들이 주최한 운동회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여성인 윤고라가 1910514일 삼선평에서 열린 사립여학교 운동회를 총체적으로 맡아 운영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향상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윤고라는 외교관인 아버지 김윤정을 따라 미국 워싱턴의 여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신문과 방송을 통해 공개 구혼한 윤치오와 결혼해 남편의 성을 따라 윤 씨로 바꾸었다. 말 그대로 가부장적 사회 구조의 틀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여성운동의 기수였다.

윤고라는 1899년 귀국하면서 S자형으로 굴곡을 이룬 롱 드레스에 가슴에는 레이스가 다양하게 꾸며진 양장에다 새의 깃털로 장식된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당시 유럽의 최신 패션인 낮의 굽의 구두를 신어 조선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남편을 찾아오는 외국인이 있으면 꼭 자신을 윤코리아라고 소개해 윤고려라고도 불린 여성교육운동가였다.

그녀는 1908년 초 황후의 휘지를 받들어 황족 부인과 각 대신 부인들이 운현궁에 모여 조직한 대한여자흥학회의 사무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811월에 양심여학교를 창립하고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뒤에는 양원여학교 교장과 영어교사, 양심여학교 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나라 여성잡지의 효시인 여자교육회 총재인 이옥경이 간행한 여자지남의 속간 사업을 돕는가 하면 1909년 여성용 교과서인 여성수신교과서’(노병선 저)의 감수를 맡는 등 여성 의복 개량 운동, 여성 교육을 위한 다양한 사업에 참여하고 공헌했다.

남편 윤치오는 조선체육회 회장을 맡았던 윤치호의 사촌 동생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작은 아버지다. 윤고라는 이런 윤치오의 둘째 부인이었다. 윤고라가 활발한 여성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윤치오의 위치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립여학교 운동회를 주관할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여성운동의 기수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근대 스포츠 보급으로 여성들의 운동 복장도 변화돼

우리나라의 초기 여성 체육은 여학교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남자들과는 달리 민족 체력 향상에 둔 모성 체육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다가 각 학교에서 운동회와 각 신문사에서 개최한 여러 경기대회들을 통해 여성들이 방관자가 아닌 실제 뛰면서 활동하고 참여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1913년 이화학당에서는 농구와 정구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학생들이 관심도 없었고 구경조차 하지 않았다가 차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나중에는 여학생이면 누구나 운동을 즐기게 되었다. 1925년 이화학당에 부임한 미스 스토버는 “3년 전만 해도 여학생들이 공을 만지기만 해도 손을 털었는데 요새는 게임에 열중해서 손, 무릎이 더러워지는데 개의하지 않는다. 전에는 이길 가망이 없어 보이는 게임은 중도에 포기하였는데 지금은 끝까지 싸우는 정신으로 경기에 임한다라고 술회할 정도였다.

이처럼 초기 여학교들의 운동회에서는 달리기, 넓이뛰기, 멀리뛰기, 공던지기 등 다양한 육상경기가 변형되어 이루어졌고 농구, 배구, 야구, 정구, 스케이트 등도 체계적이지는 않았지만 과외활동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서서히 이런 새로운 스포츠에 맛을 들이면서 본격적으로 경기로 발전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육상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주동이 돼 만든 조선체육협회가 1920516일 춘기육상대경기회를 연 것이 처음이고 체조는 19311031일 제1회 전조선기계체조대회가 우리나라 한국 체조의 효시였다. 이처럼 체조와 육상이 학교체육에서 일상화되고도 뒤늦게 경기화가 된 반면 농구, 배구, 탁구, 야구, 스케이트 등은 오히려 이들보다 늦게 시작하고도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대회가 열리면서 여자 선수 육성에 디딤돌이 되었다.

다양한 경기 종목들의 보급은 여학생들의 운동복장도 함께 변화시켰다.

1920년대 초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내 운동장에서는 배구와 농구를 배우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흰색 저고리에 검정 치마, 그리고 긴 댕기머리의 전통적인 상태였다. 하지만 여학생들의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27년에는 흰 블라우스에 검은 블루머(짧은 스커트가 달리고 발목을 맨 바지)로 된 체육복을 입었는데 이것이 한국 여성 최초의 체육복이었다. 1931년에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정구 탁구선수들은 허리띠가 있는 원피스형 흰 유니폼이 등장했고 빙상이나 체조 시간에는 세일러복 상의에 블루머와 계절에 따라 다른 색의 스타킹을 신었다.

이런 복장의 변화는 여학생들의 체육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해가고 활동도 정적인 상태에서 동적인 형태로 바뀌는 과정임을 알게 해 주는 데 일부 학생들은 드러난 살을 감추기 위해 다리에 수건을 감고 경기에 나서는 진풍경도 있었다.

 

남성 출입을 금지한 전조선여자정구대회

여성 엘리트 체육의 효시는 동아일보 주최로 1923630일 제1고녀(경기여자고등학교의 전신) 교정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였다.

경기장은 일본인 여학교인 제1고녀 교정이어서 부득이 일본인 학생들도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1·2부로 나누어 진행했는데 우리 여학교는 영명, 호수돈, 경성여고, 진명, 정신, 배화, 숙명, 동덕 등 8개교, 일본인 학교에서는 3개 팀이 참가했다.

동아일보는 역사적인 대회가 열리는 이날(1923630) 3꼿가튼 선수 일백인, 조선녀자 운동계에 처음으로 광채를 도을 금일의 제1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란 제목의 머리기사에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여자대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기다리든 오늘이 왔다! 조선에 처음으로 여자정규대회는 금 삼십일 오후 한시부터 이전 영성문 서편에 있는 정동 제일고등여학교 운동장에 열릴 예정이다. 참가한 학교가 경향을 합하여 조선인편에 여덟 학교, 일본인 편에 세 학교로 어느 편으로 보든지 여자 운동계에는 처음 있는 성황이라. 각 학교 선수들의 선수의 기술이 막상막하인 우에 십 여일 전부터 각 선수가 경쟁적으로 연습을 계속하였음으로 우승의 영광은 과연 어느 학교에서 차지하게 될는지 전혀 예상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일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는 각기 반드시 이길 자신을 가지고 힘과 재주를 다하여 싸울 터인즉 경기의 광경도 실로 전에 보지 못하던 흥미가 있을 것이다.”

이어 동아일보는 경기 진행순서, 심판원 결정, 입장권 발행, 관람할 때의 주의사항, 상품소개 등을 상세하게 안내했는데 이 가운데 이채로운 것이 바로 입장권 발행이었다.

이번 대회는 처음 보는 구경이라고 입장을 희망하는 부인이 매우 많음으로 도저히 일반에 공개할 수가 없어 참가학교 학도의 가족 되는 부인에게 입장권을 보내고 그 외에는 본일 발행하는 동아일보에 인쇄한 입장권을 베여 가지고 오는 부인에게 한하여 입장을 허락할 터이며 남자는 입장을 거절할 터이라.”

즉 남자들은 입장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아무래도 여학생들이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적으로 하는 경기인 탓에 남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가능성에 대비하는 한편으로 여학생들이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경기대회를 즐길 수 있도록 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흰 치마저고리에 백색 긴 양말을 신고 댕기드린 머리에 하얀 천을 동여맨 여자선수들의 모습은 활기에 넘쳐 있었으며 관중석을 가득 메운 여자응원단의 삼삼칠 박수 광경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경기가 열리자 초대받지 못한 남성들은 학교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에 올라가 관전을 할 정도였다.

경기는 수년 전부터 은근히 훈련을 해 온 진명과 영명이 월등한 기량을 보였는데 진명의 문상숙-김가매 조가 영명의 김효례-김용애 조를 이겨 영광의 첫 우승은 진명에게로 돌아갔다. 영명은 예선전에서 호수돈과 일몰로 경기를 못해 다음날 속개한 데다 준결승전에서 배화와 경기를 벌인 뒤 불과 10분만 쉬고 결승전에 임해 서옥현-서지순 조와 김효례-김용애 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준우승에 그쳤다. 이 대회는 제5회째인 1927년에 들어 일반인들에게 관람을 허용해 여성 스포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됐고 또한 여성들의 스포츠 참여가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이보다 앞선 1919년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일보가 주최하는 전조선여자정구대회(동아일보 주최의 대회와 같은 이름)가 단체전 위주로 했던 동아일보사 대회와는 달리 개인전 위주로 경기를 했으나 우리 선수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에 의한 대회라 하여 우리 선수들은 출전을 망설여 왔는데 동아일보가 대회를 주최하면서 일본 여자선수들의 참가를 허용함에 따라 우리 선수들도 1927929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제9회 대회부터 출전해 이화의 이보패, 김복림이 당당히 우승해 한국여성의 기개를 드높였다.

 

여성체육단체들의 등장과 여성체육 지도자들

여학교인 이화학당과 정신학당의 설립으로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조심스레 첫 발을 떼었지만 여성체육단체는 1922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로 창설된 YWCA가 최초였다. 김활란, 김필례, 유각경 등이 주도해 창립된 YWCA의 초기 활동은 계몽, 교육, 여권신장, 생활개선, 민족운동으로 물산장려 등이었으나 학교체육과 더불어 사회체육 활동에도 관여했다. 이화여자전문학교는 1923년에 교내 YWCA에 체육부를 두어 농구, 정구, 야구, 육상, 수영, 스케이트, 등산 등을 장려했다.

YWCAYMCA와 마찬가지로 선교를 목적으로 체육활동을 보급하고 장려했다면 조선여자체육장려회는 일제 강점기의 유일한 여성체육단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1930530일 김인순 등 50여 명이 발기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창립총회를 가진 조선여자체육장려회는 창립취지서에서 장차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아동의 심신이 건강하자면 먼저 어머니의 건강이 우선되어야 하고 아동의 보육을 담당할 부녀자의 체육에 관한 지식과 기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선여자체육장려회는 1931225일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창립 첫 사업으로 여자체육의 찬미와 조선’ ‘조선여자체육장려회의 사명’ ‘조선여자와 체육’ ‘아동의 건강과 여자체육등을 주제로 체육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1933427일에는 김활란을 신임 회장으로 조직을 정비하면서 서은숙 김신실, 방순경 박마리아 등이 상무간사, 이사로 참여하면서 여성들의 참여가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1930년 미국에서 체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김신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체육전문가였다. 김신실은 미국 오벌린 여고를 거쳐 오벌린 대학을 졸업한 뒤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체육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체육교수를 담당한 그녀는 6인제 여자농구, 하이킹, 사이클, 하키 등 근대스포츠를 소개하고 레크리에이션 기술을 지도해 체육을 전공하는 많은 여성들의 귀감이 되었다. 또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과 유희에 관한 지침서인 유희지침1933년에 발간해 모든 유희를 분류, 정리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 밖에도 평양의 유명한 육상선수였던 강복신은 도쿄 니카이도 여자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동덕고녀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9년 손기정과 결혼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또 이화여전의 정구선수로 활약하다 1932년 도쿄 여자체육전문학교로 우리나라 최초 체육유학을 떠나 1935년 귀국해 제13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에 심판으로 참여하면서 지도자 길을 걸은 김옥례는 조선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유교사상, 여성스포츠에 대한 이해 부족, 여성체육지도자의 부재 등의 한국여성 스포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 스포츠의 폭넓은 수용, 여성 스스로 남존여비의 봉건사상 탈피, 체육댄스의 보급과 조선 고유 전통놀이의 현대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들 이외에도 송금령, 조은경, 신보석, 임덕순, 김복림, 최이순, 서명학, 방순경, 박현옥, 김현숙 등도 여성 체육을 선도하는 지도자, 선수 생활을 거쳐 심판 등으로 활동하며 근대스포츠 보급에 힘쓴 인텔리, 신식 여성들이었다.

 

 

OPEN 대한체육회가 창작한 위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으며
이용 시에는 구체적인 위치를 표시해야합니다.
[05540]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424 올림픽회관   대표전화 02-2144-8114
Copyrightⓒ2016 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 all rights reserved.
국민체육진흥공단 본 사업은 국민체육진흥공단의 국민체육진흥기금 지원 사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