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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움직인 거인, 김운용
2015.10.13 577
  • 년월호 2015년 10월호

대한체육회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및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한 김운용(84) 씨를 2015년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했다.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은 스포츠 행정 분야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와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가 한국 스포츠계에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김운용(84·전 IOC 수석부위원장, 전 대한체육회 회장)은 시대의 풍운아다. 체육외교 변방국 출신으로 세계 무대를 주무르다시피 한 그를 해외에선 ‘불가사의한 존재(요미우리 신문)’로 부른다.

그는 사마란치가 ‘쎄울 꼬레아’를 외친 바덴바덴 IOC총회(1981)에서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으로 활약했으며 시드니올림픽(2000)에선 IOC수석부위원장으로 광복 후 남북한 첫 동시입장을 성사시켰다. 1998년 독일 스포츠전문 격주간지 ‘스포츠 인테른’이 김운용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포츠 지도자 2위’에 선정했으며 2002 부산아시안게임, 2002 서울월드컵 등에도 그의 옷소매가 안 닿은 곳이 없었다.


김운용이 퇴출된 지 벌써 10년이 넘는다. 그러나 30년 이상 한국 스포츠 외교 수장으로 세계 스포트 라이트를 받다 갑자기 내려왔기 때문에 김운용이 없는 포스트 김의 현재는 가끔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한국체육 국제무대 위상이 이렇지 않았는데…’ 하는 느낌이다. 특히 런던올림픽 등 편파 판정에서 그의 부재가 아쉬웠다.

 

 

“사상이 달라서…”


지난해 초 백선엽(95·예비역 장군)을 비롯한 원로 몇이 김동길(87·연세대명예교수)의 집에서 회동했다. 이들 80~90세 인생객은 이미 오래 전 흉금을 튼 사이다. 자신들의 지난 일과 당금 국사, 인물평 등 화제는 무궁하다. 그날은 이야기가 이중 막내(?)인 김운용의 가슴 아픈 곳에 미쳤다. 그들은 김운용이 2003년 프라하 IOC총회에서 부위원장에 당선되기 위해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방해했다는 ‘혐의’로 정치권과 언론의 비난을 한 몸에 받다 몇 달 후 법정에 서고 19년간 몸담았던 IOC에 사표를 낸 일련의 과정을 안타까워했다.

“‘국보’를 때리다니. 천하에 몹쓸…”(백선엽)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저를 왜 그토록 때렸는지…”(김운용)
백선엽이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사상이 달라서겠지”.


김운용은 1960년대 장교시절 송요찬과 박정희의 부관을 했다. 그는 4·19 학생혁명 당시 “계엄사령관 송요찬이 경찰의 실탄 사용 요청을 거절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부에선 경호실 차장(차관급)을 지냈다.


김운용이 된서리를 맞은 것은 노무현 정부 초기다. 김운용은 그가 노무현 정부의 실세들, 이른바 ‘친노’에게 당했다고 믿는다. 박정희와 노무현. 시대는 차이 나지만 두 인물은 한국 정치·사회사의 양 끝을 상징한다. 김운용은 자신이 태권도인이며 체육인으로 평생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1971년 유신정권 아래서 실력자 박종규로부터 국회의원(유정회)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할 만큼 정치와 의도적으로 담을 쌓았다. 그러나 2000년 “국회에 들어가면 체육계에 도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전국구 비례대표에 이름을 허락한 것이 평생을 흔들었다. 수십 년간 저돌적으로 지구촌을 누빈 체육계 수장은 여의도 정치 바람 속에서 버티지 못했다. IOC 내 최고권력을 두고 다투던 라이벌 자크 로게(72·벨기에·전 IOC 위원장)는 기회를 놓칠세라 법원판결이 나기도 전에 수사 개시했다는 국내 신문보도만 보고 그를 직무정지(2004.1.)시켰다. 한국체육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정치 때문에, 사상 때문에.

?“저와 경호팀 바꾸시죠”

지난 2000년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김운용과 마주친 적 있다. 태권도인 출신인 듯한 비서관들과 함께 걸어오는 그에게서 복도가 꽉 찬 느낌을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 김운용에게 “저하고 경호팀을 바꾸시죠”라고 농담 했다. 김운용의 기(氣)랄까, 팀이 그만큼 단단했단 얘기다. 하지만 정치만 해온 이들이 보기에 체육인 출신 김운용은 한 마디로 “저 사람 뭐냐?”였다. 박정희-백선엽 라인의 ‘사상’과 해외서 더 알아주는 체육권력 등은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정서로 보면 받아들이기 힘든 거들먹거림이었다. 이때부터 곱지 않은 시선이 시작됐을 것이다.


김운용 때리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2003년 프라하 IOC 총회에서 자신의 IOC 부위원장 당선을 위해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방해했다는 여론재판. 또 하나는 세계태권도연맹과 국기원 등의 공금 38억4천만원을 유용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2년 추징금 7억8천8백만원을 선고(2005.1. 대법원) 받은 사법재판. 김운용 입장에선 둘 다 억울하다.
“내가 로게 밑에 있는 것도 달갑지 않은데, 그것도 이미 한 번 해 본 부위원장 자리 때문에 국익을 팔아요? 다만 ‘평창이 이번에 힘드니 2등 하고 4년 후 성사시키자’고 말한 게 오해를 산 거지. 올림픽 유치만 100% 확실하다면 얼마든지 부위원장은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유치한 전략이고 IOC 내에서 힘을 가지고 있어야 다음에 실리를 볼 수 있어요. 당시 사마란치가 고건 총리에게 이런 점을 직접 설명했는데 수긍하지 않더라고요.”


“검찰 기소 내용을 보면 비서 4명의 7년치 수당과 봉급, 팩스사용료, 우편 요금, IOC 위원실에서 7년간 구독한 신문대금, 청소대, 약값 등이 모두 세계태권도연맹에서 나왔으니 이것이 횡령이란 겁니다. 나는 횡령이란 공금을 몰래 빼는 것인 줄 알았는데 회계를 잘 못한 것도 횡령이라니 기막힐 노릇이지요.”


갑자기 반역자로 몰려 지하감옥 샤토 딥에 갇힌 에드몽 단테스(몽테 크리스토 백작)처럼 김운용은 여기저기서 정체불명의 펀치를 맞는다. 정치권과 여론은 당시 평창유치 실패를 누군가에게 책임지우고 싶어 했다. 상당수 정치인들이 김운용의 스포츠 권력을 질투하거나 자신의 영역 안으로 흡수하려했다. 특히 IOC위원을 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한 여권 실세는 노골적으로 여러 차례 사표를 종용했다. IOC 내 최고권력을 두고 다투던 라이벌 자크 로게에게 김운용은 언제나 눈엣 가시였다. 이런 것들이 맞아떨어져 그의 몰락을 가속시켰다. 검찰수사는 흔히 그렇듯 윗선 결정 후 사후 절차로 비쳐지기도 한다. 이연택(78)은 지난 2005년초 노무현 정부 여권실세와 맞붙은 제35대 대한체육회장 선거 도중 인허가청탁 대가로 토지를 헐값 매입, 시세차익을 챙긴 혐의로 수사 받았다. 그는 이것이 선거에서 자신을 떨어뜨리기 위한 흠집 내기라고 반발했다. 김운용의 불만 역시 비슷할 것이다. 권력 주변 검찰 수사는 앙금 걷힐 날이 없다.


제4대 IOC위원인 김택수는 국회의원 배지 때문에 대한체육회장을 임기 도중 포기(1979)할 만큼 정치를 짝사랑했다. 김운용은 그 반대였다. 정치를 부업처럼, 너무 대단찮게 본 듯하다. 그게 화근이었을 것이다. 정치가와 조폭은 딴 건 몰라도 자신에게 존경을 보이지 않는 이에겐 대단히 무자비한 집단이다. 김운용 등 상당수 체육인들이 이를 모르고 정치에 쉽게 들고 쉽게 데였다.

 

 

“젊은이여, 선배에서 길을 찾길”

 

“IOC 부위원장이며 세계태권도연맹 창설자인 김운용 사건이 가장 큰 미결사건이다. 그는 양심수의 대표로 지칭되며, 한국정치가들에 의해 2003년 있었던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에 대한 희생양이 됐다.”

 

그는 최근 자신의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됐다고 여긴다. 조선대와 명지대, 국민대 석좌교수이며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도 강의하는 등 바삐 보내고 있다. 여의도 사무실에 매일 출근해 4년 전 개설한 개인 홈페이지 ‘김운용 닷컴’에 글을 올리는 등 정력적으로 일한다. 특히 기록을 남기는 데 집중하고 있다. 중앙일보에 2008년 연재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 - 올림픽 30년, 태권도 40년’를 묶어 책으로 냈다. “미련한 사람은 자기 경험에서 길을 찾고 현명한 사람은 선배에게 길을 찾는다”(중앙books). 이색적으로 긴 이 책 제목엔 자신의 경험을 후대가 섭취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겼다. 일요신문엔 ‘김운용이 만난 거인들’(2014년 11월 중앙books 단행본 발간)을, 뉴시스 통신엔 정치·사회·스포츠 칼럼 ‘산고곡심’을 연재했다.

 

김운용의 인물평은 작은 현대 세계사다. 넬슨 만델라를 비롯해 장쩌민, 고르바초프, 키신저, 손기정, 백인천, 민관식, 레이니에 국왕, 카를로스 국왕, 클린턴, 김영삼, 전두환, 김대중, 박근혜 등 수십 명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노무현 등 참여정부 인사들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아예 입에 올리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에 관해선 ‘그릇이 크다’고 했으며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송요찬, 박정희, 사마란치 3인을 꼽았다.

 

특히 사마란치는 애증의 대상이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1920~2010) 전 IOC 위원장은 11년 연하인 김운용을 ‘내 오른팔’이라고 아끼며 거물로 만들었으나 IOC위원장 선거 때 결정적으로 등을 돌려 로게를 지지했다. 김운용 역시 사마란치를 ‘학처럼 고고하다’고 칭찬하다가 ‘냉혹한 장사꾼’ 등으로 비난했다. 사마란치는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을 도왔으며 태권도를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직권상정하고 남북 동시입장을 적극 지원했다. 한국이 국제 스포츠외교에서 승승장구한 것도 사마란치와 김운용의 호흡이 척척 맞았기 때문이다. 친형제도 자주 싸운다. 김운용과 사마란치는 친형제 이상이었다. 김운용이 사면됐을 때 가장 먼저 전화하고 베이징의 호텔로 가장 먼저 달려온 이가 사마란치였다.

 

“청소년체육부를 만들자”
인터뷰를 위해 김운용을 서울 여의도 그의 오피스텔에서 만났다. 일부러 10여 년 전 그가 준 해외여행용 전자시계(듀얼 타임)를 차고 갔다. 그는 아주 짧게 시계에 눈을 주더니 싱긋 웃고 그만이었다. 한국체육에 관해 몇 가지 물었다.

 

현 단계 한국체육에 뭐가 시급합니까?
청소년체육부입니다. 노령화에 따른 생활체육과 학교체육, 엘리트체육을 전담 조정하고 학교폭력 등 청소년 문제도 체육으로 풀어야 합니다.


요즘 대한체육회는.
잘 하고 있습니다. 체육인 출신 수장이지 않습니까? 체육인 출신 대학총장, 국회위원 등도 있으니 큰 발전이지요. 체육인이 존경받는 풍토, 직원보호, 선수권익 유지에도 신경 써야지요.


스포츠외교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충고한다면.
어학과 체력이 기본이지만 국가관, 소신, 친화력, 의지가 더 중요합니다. 신뢰는 인품에서 나옵니다. 남에게 뭘 받았으면 반드시 줘야 합니다. 국가가 만들어줄 순 없고 스스로 노력해야지요.

 

그는 6개국어(영·불·스페인·독·일·러시아어)를 한다. 기억력이 좋다. ‘1947년(16세) 피아노 레슨요금이 월 2,000원, 1949년(18세) 대학 등록금이 85,000원’ 정도는 기본이고 ‘1971년(40세) 국기원 공사 당시 시멘트 한 포 270원, 철근 1톤이 2만 원’이라고 막힘이 없다. 심지어 바덴바덴 총회에 가기 위해 탔던 비행기 승무원 이름까지 기억한다. 어눌하면서도 확연한 보스 타입 말투나 싫은 사람에겐 서슴지 않고 막말을 섞는 표현도 예전과 같았다.


김운용은 매일 저녁 10시 전에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난다. 하루 한 시간 헬스를 거르지 않으며 매주 일요일 교회에 간다. 골프, 담배는 하지 않으며 술은 와인 한두 잔 정도다. 이런 습관은 사마란치와도 비슷하다.


1931년, 대구생. 부인 박동숙과 사이에 1남 2녀. 경동고, 연세대 정외과를 거쳐 애초 외교관을 꿈꿨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군인, 관료로 20년을 지내다 마흔살(1971) 이후 체육행정과 스포츠외교에 전념, 세계적 일가를 이뤘다. 태권도 공인 5단(명예 10단). 혈액형 O형, 취미 피아노 연주.
“지금부터 무조건 돕겠습니다. 이름을 달라면 주고, 뛰라면 뛰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세계 IOC위원 50명과 새벽이건 심야건 언제나 통화할 수 있습니다. 연락하라면 연락하고 만나고 싶다면 만나게 해주겠습니다.”


윤곡(允谷: 김운용의 호) 같은 인물이, 쉽진 않겠으나 언제고 또 나올 것이다. 그땐 한국 정치 도량이 좀 더 넓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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