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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대부 김용식(金容植)
2011.09.30 1,812
  • 년월호 2011년 10월호

경신의 반란

 

1929년도 조선축구의 최강은 보성전문 이었다. 그해 10월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전조선축구대회를 제패했기 때문이다. 보성전문은 제5회 대회부터 가장 권위가 있다던 이 대회에 출전했으나 우승을 거두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다 6년 만에 우승을 했으니 그만큼 팀 전력이 올라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 팀은 천하의 호걸 엄동원, 평양의 투사 임용업, 만능의 스포츠맨 김화집 등 쟁쟁한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승에서 이영민 백기주 등 이 또한 당대의 호걸들로 이루어진 전(全)연전(연희전문)을 3대1로 물리치고 우승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해 4월에 전조선체육계에 충격파를 던진 큰 사건이 벌어졌다. 전국제패를 목표로 맹훈련 중이던 보전을 한 중학(5년제)팀이 4대0으로 무참히 유린한 것이었다.

 

그 중학팀은 경신(儆新)학교, 보전을 대파하며 압승한 경기는 오사카(大阪) 아사히(朝日)신문 서울지국이 주최한 제3회 전조선 축구 결승전 이었다. 오사카 아사히신문이란 오늘날 일본 제일의 신문임을 자랑하는 아사히신문의 전신으로 1929년 당시 조선에서의 판로를 넓히기 위해 조선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축구대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대회의 회수가 말하듯 1929년도 대회는 제3회 대회였으니 제1회 대회는 1927년에 열렸는데 경신은 그 제1회 대회의 결승에서도 당시 최강 연희전문을 3대2로 물리쳐 이미 성인 일반부에 나가도 지지 않을 만큼의 실력을 경신 팀은 갖고 있었다.
그러면 중등학교급의 경신축구는 왜 그렇게도 강했던 것일까. 이유는 축구에 혼신의 정력을 쏟는 명장 김용식을 중심으로 성실한 축구소년 채금석(蔡金錫), 훗날 작곡가로 변신하는 김성태(金聖泰) 등이 똘똘 뭉쳐 맹렬한 연습 끝에 경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김용식의 소년시절

 

축구의 강호 경신 팀의 중심선수는 김용식 이었으며 그는 중앙에 위치하여 경신의 공격과 수비를 지휘하였다.
김용식의 고향은 황해도 신천. 1910년 그곳에서 태어나 고장의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부터 축구를 즐겼다. 그의 부친 김익두(金益斗)씨는 큰 영향력을 떨치는 기독교의 리더이어서 서울 파고다 공원 옆에 있는 승동(勝洞)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자 김용식은 부친을 따라 상경하였다.

 

김용식은 키는 작았지만 단단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서울의 초등학교에 전학했던 초기, 투박한 황해도 사투리를 쓰고 자그마한 신체와 더불어 일상행동이 세련되지 못한 것을 대부분 서울 본토박이인 종로 출신 학우들이 놀려댔다.
그러나 어린 김용식은 까닭 없이 모욕당하는 것을 앉아서 보고 넘기는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특유의 투지로 놀려대는 급우들을 힘으로 제압, 전학 온 한 달 만에 학급제일의 왕초로 군림하는 것이었다.
부친 김익두 목사는 그런 김용식이 초등학교를 마치자 같은 종교계통인 경신에 진학시켰으며 입학하면서 김용식은 축구부에 들었다. 황해도 신천시절부터 즐겨했던 운동인데다 한번 빠지면 철저를 기하는 그의 성격에 따라 김용식의 축구는 나날이 수준이 높아져감에 따라 부원의 리더가 되어 경신 축구부를 이끌어 나갔다.

 

경신 축구부에서 김용식과 가장 가까웠던 친구는 군산 출신의 채금석 이었다. 2학년 때부터 팀의 정 멤버가 되어 각종대회에 출전, 중등축구에서 정상에 오르자 김용식과 채금석은 인생훈(人生訓)을 정하고 평생을 변치 말고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

 

그 인생훈이란 다음과 같았다.

 

1. 술과 담배는 절대 입에 대지 말 것.
2. 몸에 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금할 것.
3. 축구선수로서 반드시 40세가 넘을 때까지 활약할 것.
4. 유명선수가 된 뒤에도 교만에 빠지지 말 것.
채금석과 다짐한 인생훈을 김용식은 생을 마칠 때까지 완벽하게 지켰다.

 

김용식이 경신5학년이던 1929년 늦가을 광주(光州)항일학생사건이 터졌다. 순수하고 혈기 넘치는 김용식은 경신학생들이 전국학생들의 항일운동에 동조하자 앞장서서 선동하며 교외데모 행진을 지휘하였다. 김용식의 행동은 곧 바로 일본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어 처벌을 요구하자 학교는 그를 퇴학시킬 수밖에 없었다.

 

보성전문의 6년간

 

1932년 김용식은 보성전문(이하 보전)에 입학하였다. 부친 김익두 목사는 아들 김용식에게 신학을 수학케 하여 후계자로 키우고자 미국유학을 목표로 영어에 열중할 것을 지시하였다.
보전 입학 후의 김용식은 학교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축구와 영어공부에만 열중하는 나날을 보냈다.

 

축구부원들이 강의시간에 강의실로 들어가려면 김용식은 축구연습을 하자며 동료부원들이 강의실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한다. 축구를 그렇게 소홀히 하면 어떻게 전국을 제패하겠느냐는 것이 김용식의 생각이었다.
대회를 앞두고는 대개의 경우 보전팀의 연습장은 경기가 치러질 서울운동장 육상경기장 이었다. 대회에 대비하여 합숙후년 중에서도 학교의 강의는 받아야한다. 모든 학업을 마치고 지정된 시간인 오후 3시에 서울운동장에 부원들이 나타나면 김용식은 벌써 축구복으로 갈아입고 동료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리고 지정된 시간인 3시에 운동장에서 축구복으로 갈아입고 있는데도 그마져 늦게 나타났다는 듯 마땅치 않은 눈초리로 동료부원들을 노려본다는 것이었다.

 

그토록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기에 김용식의 활동범위는 넓어 공격진으로 활약할 때가 있는가하면 중앙에 위치해 공격과 수비를 조율하는 플레이메이커가 되기도 하였다.

 

김용식의 열의에 이끌린 보전축구팀은 실력이 높아져 1932년에 열린 제13회 전조선축구대회 전문부 결승에 올라 연희전문을 2대0으로 물리쳐 우승을 차지했고 33년엔 조선신궁대회에 출전해 우승했으며 34년 조선체육회 창립15주년기념종합대회 전문부 결승에서도 연희전문을 2대1로 물리쳐 우승했다.

 

대표선수 김용식

 

보전축구부에서 활약하는 한편으로 김용식은 33년에는 경성축구단의 대표 일원으로 뽑혀 이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차례 펼쳐졌던 제1회 경평전의 주전멤버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35년 경성축구단은 일본서 거행된 두 차례의 축구대회에 출전하였다. 첫 대회는 6월에 개최된 제1회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경성축구단은 도쿄문리대를 6대1로 물리치고 우승했다. 도쿄문리대는 오늘날의 일본 쓰쿠바대학 전신이다.

 

11월 일본 도쿄에서는 메이지신궁대회가 열렸다. 그에 앞서 10월에 열린 조선신궁대회에서 정상을 차지해 조선대표로 출전한 경성축구단은 결승전에서 전(全) 게이오대학 팀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하였다.

 

두 대회는 1936년 베를린에서 열리는 올림픽대회 일본대표 선발전이었다. 경성축구단은 두 대회 모두를 제패했으니 주축 선수들 대부분은 당연히 일본대표로 뽑혔어야한다. 그러나 일본 축구협회는 침략국답게 경성팀에서는 오직 센터하프로 활약한 김용식 하나만을 대표로 뽑았다. 그만큼 김용식의 실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로 뽑았으면서도 일본축구는 김용식에 대해 냉담하였다. 그런 태도가 베를린 현지에서도 변하지 않자 김용식은 감독에게 자비로 돌아갈 터이니 맡겼던 여권을 달라며 항의하였다. 기백에 눌린 일본팀 감독 다케노고시(竹腰)는 그 순간부터 태도를 달리하며 일본의 첫 상대인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김용식을 센터하프로 뛰게 하였다.

 

경기가 2대2로 팽팽한 흐름이 이어가고 있을 때 스웨덴 공을 가로챈 김용식이 긴 드리볼로 상대 진영으로 들어가 동료 공격수에게 절묘한 패스를 보냈고 이어서 쏜 슛이 그대로 스웨덴 골대 안에 꽂혀 일본은 3대2로 이겼다. 그러나 일본은 2회전에서 유럽최강 이탈리아에게 8대0으로 졌다. 이탈리아는 결승에서 오스트리아를 2대1로 물리치고 우승하였다.

 

김용식과 영어

 

보전 2학년 때인 1934년 조선축구협회는 젊은 선수들 위주로 조선축구단을 결성하였고 그길로 일본에 원정하여 6전 전승을 거두었다. 그해 가을 조선축구단은 중국으로 원정 가서 3승1무승부의 압도적인 경기력을 펼치며 개선하였다.

 

선수단이 베이징에 들렸을 때 김용식은 한권의 책을 샀다. 영국인 케일지 헌트란 사람이 쓴 '축구 지도서'였다. 귀국 후 김용식은 자신이 가진 영어실력을 발휘하며 번역을 하였고 반복해 읽으면서 책의 내용을 완전히 습득했다. 이는 곧 김용식의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차 김용식이 코치생활을 하는데도 큰 길잡이가 되었다.

 

부친 김익두목사가 후계자로 키우려고 아들에게 영어를 배우게 한 것이 한국축구의 국제화에 기여하는 효과로 나타나 영어에 능통한 축구인 김용식의 존재는 선수 이상으로 컸던 것이다.
1962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경기대회에 김용식은 한국대표팀의 감독으로 출전하였다. 그러면서 현지에서 열린 AFC(아시아축구연맹)총회에 대한축구협회를 대표한 대의원으로 출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북한 축구협회가 회원국으로 가맹하겠다고 대표를 파견하여 맹렬히 지지운동을 펼쳤다. 총회가 북한 측 입장을 지지하는 분위기로 가맹에 대한 가부를 물을 때 한국대표 김용식은 어릴 때부터 경쟁 속에서 싸워왔던 배짱을 발휘하여 "북한을 가맹시키고 안 시키고는 여러분들에게 달렸다. 그러나 가맹될 경우, 여러분은 AFC창립 이래 친근한 친구 한나라를 잃을 것이다. 알아서 처리하시오"라고 발언하고는 그 자리에 있던 각국대표들을 노려보았다. 그런 모습에 일순간 회의장에 긴장감이 감돌고 북한의 가맹 신청은 접수치 말자는 동의가 나오며 결국 북한은 가맹에 실패하고 말았다.

 

김용식의 선수생활은 철저한 몸 관리로 1952년인 42세 때까지 지속되었다. 8.15 후에는 강력한 조선전업팀을 만들어 코치 겸 선수로 뛰며 전국을 평정하고 1948년 런던올림픽에까지 출전했으나 1952년 현역선수 은퇴 후 1969년까지 코치로만 활동을 했다.
그는 축구이외에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스포츠의 명문인 보전을 졸업했고 보전출신 스포츠 인들이 대한체육회 등 스포츠행정 기관에 수많이 진출했건만 김용식은 오직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맡았을 뿐 그야말로 '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 축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넘치는 대부였다.

 

그의 향년은 1985년, 축구와 일생을 함께한 75년간의 평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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